4월 16일

평생 매년 눈물흘리겠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읽던 책도 안읽히고 하던일도 손에 안잡힌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한창 학부때 학교에서 밤새우고 아침에 첫차가 뜨면 지하철타고 집에 돌아가 2-3시까지 자고 4시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곤하던 때였다. 그날 거실엔 티비가 켜져있었다. 엄마가 늦게까지 티비를 봤나보다 싶어서 소파에서 리모콘을 찾고 막 끄려고 했다. 그때 본 침몰되는 배의 이미지는 전혀 위협적이라던가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전쟁, 기아, 사고현장, 각종 폭력적이고 위태로운 이미지를 뉴스로 접할 때 그 거리감 딱 그정도였다. 그저 곧 구조되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1시쯤 일어났다. 엄마가 방에서 나온 나를 울던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는 그렇게 거실에 앉아서 아무말도 없이 뉴스만 보고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영상으로 송출되는 상황을 부감시로 하늘에서 바다로 찍힌 수직선상의 카메라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 공통된 트라우마적 경험은 그당시 한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면 누구나 가졌을법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4월 16일이 되면 매년 눈물 흘린다. 그리고 화가난다. 첫째로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 희망이자 미래였을 아이들을 볼 기회를 빼앗긴, 이제는 아이들과 영원히 소통할 수 없는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눈물짓다가, 당연히 구조될거라 믿은채 구조되지 못했던 것에 대한 깊은 분노, 그리고 마땅히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나눠가졌던 그 권력이라는 위치에 관한 불신으로 화가 나는 것이다.

권력을 불신한다

울면서 생각한 참 개인적인 서사이지만 난 이 글이 누군가에겐 힘이될거라 믿는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내가 24살 때, 아직 대학원 논문도 쓰기 전에 나에게 누군가 찾아와 명함을 주며 “전시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거였다. 나는 기회가 찾아왔음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 기회는 공짜가 아니었다. 갤러리를 소유한 대표라는 사람이 밤 11시쯤 전화를 걸어 말했다.

“지금 작가노트를 보니까 영 엉망이네. 이대로는 갤러리 홈페이지에 올릴 수가 없으니까 당장 교정받으러 사무실로 와요.”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답했다.

“고쳐준다고하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지금 상황을 잘 모르나본데…이렇게되면 뭐 전시 없던일로 하지 아무튼 우리도 이런 작가노트 올리기에 창피하니까.”

수모를 견디고 전시를 마쳤다. 그리고 전시 뒷풀이를 가졌다. 전시 뒷풀이에 온 큐레이터는 당시 남자친구를 처음 보고 모두가 택시를 잡으러 나간 사이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되면 나는 어떻게되는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은 한국 미술계에서 누구나 아는 그 평론가가 그룹전에 찾아왔다. 자신은 아날로그 폰을 쓴다며 내 번호를 가져간 후 몇번이나 연락이왔다.

“OOO 선생님 전시 오프닝 내일 저녁인데, 도움 될거에요. 소개시켜줄테니 같이가요”

20대일 때 나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들을 이용하는게 아닐까. 내가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척 하는게 아닐까 늘 의심하고 내 스스로를 믿지 않았다. 아주 빠른 결단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탈코르셋’이라는 대열에 합류했다. 다시는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결혼했다 (물론 곧이어 이혼했다). 나를 이 세상에서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내 스스로가 더이상 기회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방법 뿐이었다. (그마저도 착각이었다는걸 곧 깨달았지만)

뭐 아무튼, 탈코르셋 이후, 결혼과 이혼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게 있을까. 아니 사실은 없다. 주변 친구들은 내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어느정도는 동의한다. 이 글에서 밝히는 일은 내 첫 데뷔 그러니까 2016년도 부터의 일과 최근 2025년의 일만 적은것이니 그 사이엔 무슨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자면 밤새워 얘기해도 모자라다.

아무튼 한국에서 미술 작품 판매를 돕겠다며 나타난 한 남자는 내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디지털 스토킹 하며 온갖 자신의 일방적 사고로만 뒤엉킨 집착성 메일을 보내며 염탐을 일삼고, 내가 멘토라고 생각해 따르던 한국의 한 예술 경영인은 그가 베니스 비엔날레에 관계자로 참석했을 때 내가 사는 런던이 베니스와 가까우니 당장 베니스로 오라며 자신이 묵고있는 호텔방에서 자고가라했다. 이들이 행하는 경계없는 행위가 내가 경계가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걸까? 이들이 가진 권력이 선을 넘어도 용인받는 위치인걸까?

미술계엔 권력이 아직도 있다. 전세계에 있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기회를 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매력있는 여자친구같은 도구가 되어주길 바란다. 관계에 헌신하며 지속가능한 소통을 기반으로 같이 성장하는 그런 신뢰, 파트너쉽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닌 알량한 로맨틱한 느낌을 주는 관계, 그것도 아니라면 전시 보러갈 때 옆에 끼고가기 좋은 젊은 여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자신의 커리어를 빛내기 위한 말잘듣는 부하. 내가 나이가 들면 이제 커리어를 시작하려는 젊은 남자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일이 있을까? 그들은 내 도움이 얼마나 필요할까?

불신을 의심말고

“그림 그리려면 돈많은 남자 만나서 편하게 작업해야지”

아, 이건 우리 엄마만 나한테 한 말은 아니다. 내가 석사때 처음 학교 정교수로 오셨던 나한텐 엄마보다 더 엄마같았던 노선생님, 노선생님이 오시자 정년으로 은퇴하신 박선생님, 그 이후로 만난 몇몇의 한두세대 위 ‘언니’들은 그렇게 똑같이 말했다. 그들이 나쁜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시대엔 그게 맞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밖에서 정기적으로 일해 수입을 가지며 작업을 지속할 수 있던 시대도 아니다. 지금처럼 비교적 선택지에 속하는 결혼도 무조건 해야만했던 세상이다. 20대엔 그들의 말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면서도, 한편으론 남몰래 내 커리어를 경제적으로 서포트할만한 남자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굳이 예술가가 아니어도 여전히 많은 여성이 가정을 위해 가사 노동을 자신의 경제적 위치로 선점한다. 그 선택은 도덕적으로 가치평가 받아야할 주제가 전혀 아니다. 작품 생활을 스스로 해나가고싶은 젊은 여성 예술가들에게 부과된 작품에서의 커리어와 가사노동 (일명 취집)은 같이 취득해서는 안될 어떤 상반된 모순이 존재하는 두가지 다른 커리어이기도 하다.

내 불신엔 이유가 있었고 이제 그 불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권력의 상호작용으로 파생된 이 알량한 관계는 지속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오늘 나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나에게

“전시 해볼래?”

라며 다가왔던 수많은 큐레이터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여성 큐레이터는 딱 한명 있다. 그마저도 나를 다른 갤러리 대표들에게 소개하며 내 지도교수님의 이름을 빌려 “OOO선생님의 그녀”라고 소개했다. 여성 큐레이터라고해서 권력의 맛을 피해갈 순 없다. 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젠더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스스로 벌고 스스로를 위해 쓴다. 회사에서 연봉을 받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적게 벌겠지만, 그것에 불만이 없다. 그림을 그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계획을 잘 만들어 잘 운용해야하는 독립적인 노동자일 뿐이다. 그림은 화가에게 당장 돈을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서포트 할만한 일을 해가며 작업을 해야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회사에 고용된 직원이되었다가 회사 대표가 되어야하는 상황이다. 물론 지원받아 작업하는 사람들과의 속도는 다를것이다. ‘돈 많은 남자’에게 돈을 받아 작업을 한다는 언니들의 ‘이상적 시나리오’는 창작노동, 예술이 아닌 해야만하는 ‘다른 일’에 쓰는 시간을 생략하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작업 영감은 창작 노동을 제외한 ‘다른 일’에서 온다.

하고싶은 일을 합시다

마침 오늘 오전 가스통 바슐라르에 관한 책을 읽다 그의 생애를 찾아보니, 참 부지런히도 살았다. 공부하기 위해 우체국에서도 일했고 중학교 교사로도 일하며 꾸준히 저서를 냈다. 그가 자연과 삶, 공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의 저서를 보면 여지없이 알 수 있는데, 결국 인간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렇게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 외의 방해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그 하고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방법밖엔 없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스통 바슐라르처럼 중요한 저서를 내지 않고도, 그를 너무나 존경했던 이브클랭같은 작품을 만들지 않고도 스스로의 작품에 매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창작은 계속된다. 작품이 만들어나갈 대화는 내가 죽어서 이루어지더라도 괜찮으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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