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d me not

‘체하다’는 영어 표현은 없다. 지금처럼 지독한 소화불량에 시달려야하는 때가 또 있을까. 오장육부의 움직임이 정지한 것 같은 그런 상태 말고, 지금 이 순간, 한국 사람이라면 심리적으로 ‘체한’상태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20대엔 섭식장애로 시달렸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몸과 친해졌다. 가까운 친구와 통화할 때면 “서른이 되서야 제대로 눈 뜨고 사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위장병과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직접 겪은 바가 있으니 누군가 소화불량으로 시달릴때면 종종 그 출구없음에 공감할 수 있다. 어릴땐 할머니가 손가락 끝을 바늘로 따줬지만, 그런 민간요법의 시각적 효과만큼 빠른 진통제는 이제 나한테 없다. 최근 10대 여자 청소년 거식증 환자는 97% 증가했고 폭식증, 거식증 등 식이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는 10명 중 8명 가량이 여성이다. 나조차도 10대부터 극단적인 식이절제, 식이요법 후 폭식을 반복하기를 10년, 매일같이 위장약을 달고살았다. 굳이 섭식장애라는 무서운 단어를 쓰지 않고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거식증이나 폭식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인식하고있다. 그렇담 먹는 것과의 전쟁은 끝났는데, 심리적으로 체한 상태로 지속된 영원한 휴전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외국에서의 소화불량은 한국에서의 체한 증상의 그 심리적 상태를 동반하지 않는다. 

Bloated feeling or Upset stomach or Nausea or Indigestion 그 어떤것도 체했다는 표현을 담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막힘의 물리적 감각은 심리적 정체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체(滯) + 하다’의 滯는 막힐 체, 머무를 체로 지체하다의 체와 같은 단어이다.


반대로 ‘feeding’은 한국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영어 단어이다. 밥먹는 콩순이는 입에 구멍이 나있다. 솜으로 된 몸 안에는 소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장기도 없지만 혼자만 쓰는 변기도 가지고 있었다. 콩순이에겐 내가 먹던 과자며 밥이며 모두 우겨넣어줬다. 그렇게 콩순이에게 밥을 ‘먹여준다’고 생각했다. 여성이 ‘먹는 것’ 그리고 ‘먹이는 것’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한국어 단어로 ‘먹이’거나 ‘먹여주기’를 이해할 때, 그 행위에 자기 자신이 내포되기 때문이 아닐까? 애초 모유수유를 할 수 있게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사실을 알게된 여성이,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feeding한다는 인식, 곧 스스로를 돌보는 경험, 관계를 형성하기도 전에 먼저 다른 누군가를 먼저 먹여주는 경험을 더 중요한 감각으로 형성하도록 교육받지 않았던가? 또는 반대로 먹는 것을 절제함으로서 인정받는 경험을 가지지 않았던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는 손자에게 묻는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게 뭐라그랬지?”

“내가 밥 많이 먹는거”

하지만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먹기를 강요당한다. 

이 두 캐릭터의의 차이점이 무엇이었을까.


영화와 책을 동시에 같이 본건 우연이지만 우연에따라 읽게되고 보게되고 듣게되는 모든 예술 형식들은 내가 그리는 그림과 마치 누군가 지켜보며 나에게 던져주는 것 처럼 항상 그들끼리 맞닿아있다. 나는 이럴 때 우연을 넘는 감각을 느낀다. 장난스럽게 말하자면, ‘신이 왔다’고. (그렇기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보는 것’ 대한 철학적 논증은 신비주의적으로 들리지만 시각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주 Criterion 계정에 에 우연히 뜬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고,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 번역본을 동네 책방에서 마주치고 사게된 일, 책을 읽으며 한국적 표현과 영어적 표현의 언어적 다름을 문학적으로 인식하는 과정,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다 갑자기 알게된 팔레스타인 저널리스트의 부고 피드, 잔뜩 체한기를 가라앉혀주던 할머니의 손길,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지독하게도 먹이는 것 밖에 모르는 나의 외로운 엄마의 사랑 방식이 어떻게 우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한 순간 출연했으며 그 모든 것의 시각적 연상은 어떻게 입에 연결된 내장기관이 없는 콩순이의 구멍난 입술로 귀결되었을까. 이 생각을 하고있던 찰나 Polo & Pan의 Cadenza를 듣고있었다. Cadenza, 반복되는 가장 단순한 멜로디의 계속되는 변형은 이 지속된 연속의 경험, 지연의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나의 경험이 절대 한 개인이나 시대의 것이 아닌 반복된 연속적 공통된 경험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Feed는 고대 영어 fēdan 에서 유래했다. to nourish, to give food to, to foster의 뜻을 가진다. 즉 feeding은 단순히 먹이는 행위가 아니다. 살게 하는 손, 자라게 하는 마음, 기운을 덜어주는 행위이다. Feeding 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먹이다라는 뜻으로 너무 기계적이고, 수유하다는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한정된다. 먹여주다의 한국말도 ‘주다’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돌봄과 사랑이 약화된다. ‘기르다’는 식물, 아이, 동물로 대상이 제한되며 노동, 감정, 생존이 합쳐진 개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전쟁의 폭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던 Hossam Shabat이 며칠전 세상을 떠났다. 그의 폭력에 맞서는 위대함과 용기는 사진만 봐도 바들바들 떨리는 내 몸을 몇번이고 감싸안았다. 그의 용기가 어떤 질문을 하게했다.
“내가 세상을 위해서 가장 작은 실천적 salvation을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그러자 내 안에서 아주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먹이는 것.”


체기가 도저히 가시지도 않는 마당에 누군가를 먹인다는 것이 가능한일이기나 할까. 누군가를 먹여살리기 이전에 나 자신을 먼저 보호하고 양육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Feeding하려는 욕구만 넘쳐나는걸 보면, 우리가 더이상 feeding하고도 만족할 수 없는 세상에 살게된 것 아닐까. 디지털 feeding(돌봄)이 과잉섭취되면서 소비되어버린 이미지는, 이제 소화불량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 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엔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지연의 경험이 맞닿아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 개인적인 경험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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